인문/책

[書說] 장미와 주목 (아가사 크리스티 作)

천사환 2021. 9. 1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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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아가사 크리스티'를 추리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그녀의 소설을 읽어야지 생각하고 <끝없는 밤>을 들었다가 내 정서랑 맞지 않아 중간에 내려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매력적인 표지에 이끌려 <장미와 주목>이라는 책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처음으로 완독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6편의 장편 소설 중 하나로, 추리소설이 아니라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를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심리소설이다. 1인칭 시점으로 '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나'만이 아닌 각각의 캐릭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면서 소설로 이끌어 들이는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탁월한 심리묘사는 그녀의 명성이 전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통사고로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된 '휴 노리스'는 '나'로 등장하며 '세인트 루'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중에서도 보수당 후보로 정치로 참여하게 된 노골적인 기회주의자 '존 게이브리얼'과 남다른 순수함과 품위를 갖춘 귀족 '이사벨라'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전개 방식이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에 가깝기 때문에 자세한 플롯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야기의 세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휴 노리스', '존 게이브리얼', '이사벨라' 중 어느 누구를 보더라도, 작가가 인간 내면의 자리 잡은 고유한 계급의식을 건드리면서 그것을 초월한 삶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강제된 역할을 하는 '휴 노리스'

모두에게 굉장히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다반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휴 노리스'와 같은 신체적 장애일 것이다. 아무래도 거동이 불편한 '휴 노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가는 '휴 노리스'의 '듣는 역할'은 자발적이기보다 강제되었다고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들어야 하는 소명이 생겨버렸다. '휴 노리스'가 '듣는 것' 이외의 새로운 행동을 찾거나 시작하는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어진 자리에서 제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고 자신만의 신념이 살아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존 게이브리얼'에 대한 반감, 그리고 '이사벨라'를 향하는 마음을 대표로 그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듣는 자'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강제된 역할은 새로운 역할을 찾는 필요와 힘을 줄이고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게 한다. 사실 '휴 노리스'의 신체적 장애가 역할의 제한을 가져왔지만, 여기서 강제된 역할을 부여한 것은 사회이다. 때문에 그의 수동성에 대한 책임은 본인보다는 사회에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신체적 장애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준도 강제된 역할을 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민해보고, 사회가 그런 약자들이 계속해서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좇는 '존 게이브리얼'

'존 게이브리얼'은 참 미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인물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계급의식에 제일 근접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기회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뛰어난 언변으로 당선이 유력한 보수당 후보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다만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는 태생과 신분에 집착하며 귀족들을 보며 열등감에 젖어 있다. '존 게이브리얼'이 양두구육의 이중성을 가지고 기회주의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혐오감이 들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에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그의 방식대로 쌓아온 명성과 지위는 결국 스스로가 가진 계급의식에 의해 붕괴된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일삼으며 악착같이 위로 오르고자 했던 까닭도 그가 가진 미련한 계급의식 때문일 것이다. 가슴 한편에 놓인 상류층을 향한 증오가 귀족과 그의 출신인 노동계급을 더욱 분리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급의식은 '존 게이브리얼'같은 노동계급에서만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사벨라'와 같은 귀족에게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주는 계급의식은 조금 뒤틀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설의 시대는 귀족들이 허울만 가지고 있고 능력 있는 노동계급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 시작하는 때이다. 즉,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존 게이브리얼'은 노동계급으로서 상류사회를 증오하고 동경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도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적 수준에 따라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으로 구별되곤 한다. 그때그때의 기준과 상황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척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고정된 위치에 있고 다른 층과는 벽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자본주의의 한계로 그러한 인식과 실제로 들어맞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계급의식이 존 게이브리얼의 것과 마찬가지로 건전하지 못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결국 계층 간 갈등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동화 주인공 같은 성 안의 귀족 '이사벨라'

'이사벨라'는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순수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수함이 강인함에서 나오는지 단순히 바보 같은 것인지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그녀는 평소에 그토록 기다리던 약혼자 '루퍼트'를 두고 존 게이브리얼과 함께 멀리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언제나 세인트 루 성의 공주님으로 남을 것 같던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은 내게 꽤나 의외였다. '이사벨라'는 귀족으로서 '만들어진 삶'을 살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살면서 그 세계 밖으로 잘 나가려고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받은 귀족 교육에 길들여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원하는 삶이 아니라 '만들어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런 그녀가 존 게이브리얼을 택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 선택까지 의연하게 살아온 것은 조금은 바보 같으면서도 그 선택 이후에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은 것은 그녀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장미의 시간은 주목의 시간과 같다

선택은 참 숭고한 것이다. 그녀가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은 마치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처럼 아름다운 순간이다. 비록 꽃이 지더라도 그 장미의 시간이 주목의 시간보다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인생과 시간은 다르지만 그 속에는 나름의 고뇌와 성장이 있기에 모두 가치 있는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세 인물의 이야기는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주체적인 선택. 소설이 발표된 1947년 이후로 6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방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코로나19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는 지금 잘못된 계급의식이 사회를 지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도우며 계층 간 분리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 것이다.

 
장미와 주목(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3)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장미와 주목』. 《봄에 나는 없었다》, 《딸은 딸이다》에 이은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의 세 번째 작품으로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복잡하고 기묘한 인간 심리의 미스터리를 통찰한 애거사 크리스티의 심층적 심리 소설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두 남녀가 함께한 삶의 끝에서 비극을 맞이하고, 화자인 주인공이 그 비극 속에 감춰졌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을 특유의 간결하고 신랄한 문체로 그리고 있다.
저자
애거사 크리스티
출판
포레
출판일
2014.09.22


참고문헌

아가사 크리스티. (2014). 장미와 주목. (공경희, 역). 포레. (원본 출판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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