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시

[詩說] 도종환의 <바람이 오면>

천사환 2022. 1. 3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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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오면

                                         도종환

바람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두었다가

가게 하세요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

세월도 그렇게

왔다간 갈거예요

가도록 그냥 두세요

 

 

우리는 바람이 지나가고 세월이 흘러가는 그 길목에 서있다. 바람이 온다고 해서, 또 간다고 해서 구태여 막는 일은 없다. 하지만, 길목에 선 우리는 차갑고 매서운 풍파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 괴로움이 잦아지고 그에 익숙해지는 것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세월을 맞으면서 겪는 그리움과 괴로움의 감정에 점점 무뎌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고통을 받아들이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맡기게 되었을 뿐이다. 도종환 시인의 <바람이 오면>은 우리가 그렇게 늙어감을 말하고 있다. 

 

과거에 라디오에서 '언젠가부터 세월이 지나가는 것을 보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해졌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책에서 인용한 것이었는데 정확한 출처는 안타깝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가 세월이 흐른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간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인지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본능적 공포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마주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월은 그냥 시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지나가는 것이다. 이에 무감각하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솔직히 매년 해가 바뀔 때마다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아쉬움은 비단 내게만 드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아직 피우지도 못한 꽃이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덩달아 꽃을 피울 가능성도 줄고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대기만성으로 더 예쁜 꽃을 피우겠다는 자신감과 믿음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사실 마음속으로 바람이 오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가끔 그러지 못해 스스로가 만든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경우는 존재한다. 그리움은 나쁜 게 아니지만 언제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를 과거로 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미래'로 나아가게끔 하는 능력이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증진할 수 있겠는가?

 

바람과 그리움을 그냥 두는 것은 시에서는 쉬운 일인 양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도중에 이미 많은 바람을 맞았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삶을 지내며 경험적 산물로 적절한 용기와 믿음을 얻는다면 점차 세월을 그냥 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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