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시

[詩說] 이문재의 <사막>

천사환 2021. 12.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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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이문재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사막'은 흔히 생명이 살아가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런 불모의 땅인 사막에서 모래알들이 가지고 있을 연대감을 떠올렸다. 모래알들은 각자가 외롭지 않을 만큼 가까지만 또 서로 너무 간섭하지 않도록 거리를 둔다. 생명은 허락하지 않는 퇴약볕을 견디며 굳건히 자리를 유지하는 이유가 그 '사이'일지도 모른다.

우리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래'를 '인간'으로 바꾸어서 생각해보자. 사회에서는 무수한 인간관계들이 형성되고 각각의 관계 속에서 적당한 '사이'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과열되어 있는 오늘날 '사이'를 유지하며 건전한 인간관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어렵다. 사방에 벽을 세워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냉랭한 태도로 자발적 '고독'을 만들기도 하며, 오히려 잘못 가늠한 거리에 오지랖을 부려 인연을 망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사이'가 없다면 사막은 모래마저 숨 쉬지 못하고 썩는 곳이 될 것이다. 인간도 각자의 관계 속에서 '사이'를 만들어 나가며 숨 돌릴 곳이 필요하다.
물론 '사이'가 꼭 인간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 필요한 '틈'을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고립된 것은 썩어 문드러지기 마련이다. 잠깐씩 빠져나갈 수 있는 '틈'이 필요하다. 우리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적 사이'인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발버둥 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쉬고 세상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때가 종종 있다. 거리두기는 힘든 상황에서 잠시 쉬어가는 도피처가 될 수도 있고 상황을 객관화시켜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세상이 종종 삭막하고 빡빡하게 느껴지는데 각자의 방법으로 관계나 일상에 적당한 '사이'를 두어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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