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영화

사라진 시간 (2019)- 배우 정진영의 감독 데뷔작

천사환 2025. 4. 1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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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시간
감독: 정진영
출연: 조진웅, 배수빈, 정해균, 차수연
개봉: 2020. 06. 18.

저는 최근에 본 한국 영화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였습니다. 관람객들의 평은 좀 엇갈리는 것 같지만, 영화가 기존의 한국 상업영화와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아마 모두 동의하지 않을까 싶네요. 정진영 씨가 다음에는 어떤 영화를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를 말하고자 하니 어려운데.

시골에서 근무하는 남교사와 그의 아내가 특별한 사정을 지닌 채 화재사고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화재사고 조사를 위해 온 경찰(조진웅)이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소동을 부리다가, 자고 일어나니 자신이 경찰이 아니라 교사가 되어 있습니다. 혼란에 빠진 그가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다 끝나는 영화입니다.

 

경찰 '형구'가 교사로 바뀌는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 영화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개봉 당시에는 몇 커뮤니티에서 이 영화가 'K-멀홀랜드 드라이브'로 퍼졌던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에 처음 린치 감독 영화 볼 때, '이게 뭐지?' 하면서 떨떠름했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이제는 그런 유의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된 거 같아서 재밌게 볼 수 있었습니다.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중간에 인물들의 관계와 이름 모든 것이 바뀌는 데, <사라진 시간>에서는 주인공인 '형구'를 중심으로 변화하고 본인이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에서 다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변화한다는 점과 변화된 후 기존의 소재들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전체적으로 정진영 감독은 그런 스토리라인을 재미있고 한국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조진웅 씨를 비롯한 다른 배우분들의 연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006184072H

한국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몇 내용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직접 들어가서 확인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최근 정진영 감독은 한경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고 '모르겠다'는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며 "영화를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제대로 보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배우로 활동하면서 한국상업영화 시장을 가까이서 봐 온 그가 관객들의 혹평도 각오하고 자신의 예술을 펼쳤다는 부분이 정말 멋졌습니다. 

정 감독은 "애초에 안전한 규칙대로 가려고 한 작품이 아니다. 그저 자유롭게 쓴 작품이다. 더 많은 관객이 한번에 와닿는 영화가 아니라 한 템포, 두 템포 뒤 생각나는 영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안전한 규칙'을 이용한 양산형 영화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연출을 만들어내는 감독과 열심히 하는 연기자들, 그리고 마케팅하는 배급사들의 노력이 있기 때문에 비하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나서 아무것도 안 남는 그런 영화보다는 감독님이 의도한 대로 <사라진 시간>처럼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영화를 개인적으로 더 선호합니다.

 

저도 감독님이 의도한 대로 <사라진 시간>처럼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영화를 개인적으로 더 선호합니다. 우리가 흔히 레파토리가 뻔하다고 생각하는 '안전한 규칙'을 이용한 양산형 영화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처럼 시장에 도전적이고 생각해 볼거리가 많은 영화도 계속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정진영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타인이 규정한 삶과 자신이 바라보는 삶, 부조리한 간극 속에 놓인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을 과감히 탈피하는 패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의 결말과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끝낼까 정말 궁금했었습니다. 처음에 나온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되는 여자의 병과 그리고 하룻밤 새 변해버린 형구의 삶, 물론 현실은 아닙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습니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어떨까' 한 번쯤 해볼 필요가 있는 질문 같습니다. 저는 매일 밤 다른 사람이 된다는 병은 '내가 모르는 나'를 깨닫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 내가 몰랐던 나를 스스로가 되었든 타자에 의해서든 새롭게 알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문에 혼자 신기해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여자가 어젯밤에 누구로 변했냐고 묻고 또 행여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을까 걱정하는데,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도 모르게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걱정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종종 있습니다. 제 생각에 형구를 통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가 충동할 경우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할까'의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형구의 그런 고민을 보여주고, 결국 사회 속의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지키고자 했던 나의 모습이 버림받을 수도 있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참 좋다"는 정말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닌 반어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도중에 초등학생들이 국어 교과서에 나온 '참 좋다'라는 말의 쓰임을 소리 내어 읽은 장면이 떠올라 반어적인 의미가 강화되었습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그냥 별생각 없을 때도 '좋아'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근데 또 진실로 좋을 때는 그렇게 많이 없습니다. 삶이 그런 것 같아요. '좋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는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며 행복을 추구하고 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멋진 삶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는 예상은 했는데 생각보다 더 영화를 안 좋게 본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재미있게 봤으니 만족은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 속에 나름 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상업영화에서 잠깐 숨 돌릴 수 있게 만드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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